이정표 하나가 증명한 공룡능선 4.1km, 5시간 54분
등산 · 발행일 2026. 8. 30. ·
공룡능선을 걸은 날은 2022년 9월 10일입니다. 설악동 소공원 쪽에서 밤에 출발해 마등령까지 캄캄한 오르막을 올랐고, 마등령삼거리에 올라선 것이 해 뜨기 직전이었습니다. 그 오르막 구간은 사진이 한 장도 없어서, 이 글에서 시간을 복원할 수 있는 것은 능선에 올라선 뒤부터입니다.
이 산행은 당시 사진 몇 장과 짧은 소감만 올려두고 지나갔습니다. 최근에 원본 사진 파일을 다시 열어보니 아이폰이 남겨둔 촬영 시각과 GPS 좌표, 고도값이 전부 붙어 있었습니다. 시계를 챙겨 보지 않았고 기록 앱도 남기지 않은 산행이라 시간 배분을 재구성할 방법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사진 스물세 장이 대신 시간표를 남겨준 셈입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그 값들을 순서대로 늘어놓고 다시 정리했습니다. 아래 나오는 시각·고도·좌표는 전부 제가 그날 찍은 사진에서 읽어낸 값입니다.
직접 촬영(2022.9.10 05:52, 마등령삼거리 부근 · GPS 고도 1,132m) — 해가 오르기 전 하늘이 먼저 붉어졌다
이정표가 대신 증명해준 숫자
이 글의 결론부터 적겠습니다. 능선 끝에서 만난 이정표 사진 한 장이 그날의 기록을 확정해줬습니다.
신선대에서 찍은 사진에 국립공원 이정표가 정면으로 들어와 있습니다. “설악 03-08, 해발 1214m”이라는 위치 표지가 붙어 있고, 화살표는 마등령삼거리 4.1km, 비선대 7.6km, 대청봉 3.5km, 희운각대피소 1.0km를 가리킵니다. 이 사진의 촬영 시각은 11시 34분입니다.
한편 마등령삼거리 일대에서 찍은 첫 사진의 시각은 05시 41분입니다. 즉 이정표가 4.1km라고 적어둔 거리를 5시간 54분에 걸쳐 지나온 것입니다. 시간당 0.7km입니다. 걷는 속도라기보다 기어 올라가고 내려가는 속도이고, 실제 체감도 정확히 그랬습니다.
또 하나 확인된 것이 있습니다. 이정표에 적힌 해발 1,214m와 그 사진에 박힌 GPS 고도값 1,213m가 1m 차이로 맞습니다. 사진 EXIF의 고도값을 신뢰할 근거가 하나 생긴 셈이고, 그래서 이 글에서는 각 지점을 판단할 때 좌표보다 고도를 우선해서 봤습니다.
05:41 — 마등령삼거리, 아직 어두운 하늘
첫 사진은 고도 1,125m, 좌표 38.1609/128.4413에서 찍혔습니다. 마등령삼거리 안부입니다.
직접 촬영(2022.9.10 05:41, 마등령삼거리 · GPS 고도 1,125m) — 아직 파란 어스름 속에 암봉의 윤곽만 보인다
사진이 어둡습니다. 나뭇가지 실루엣 사이로 능선의 톱니 같은 윤곽이 겨우 드러나는 정도입니다. 이 시각까지 올라온 구간은 사진이 아예 없습니다. 헤드램프 빛이 닿는 발밑 말고는 볼 것이 없었고, 사진을 찍을 이유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여기까지가 이 산행의 첫 번째 관문입니다. 소공원에서 마등령까지는 고도를 1,000m 넘게 올려야 하는 긴 오르막인데, 이 구간을 다 소모하고 나면 정작 공룡능선은 시작도 하지 않은 상태가 됩니다. 공룡능선을 두고 “체력 배분이 전부다”라고들 하는데, 그 말의 절반은 능선이 아니라 능선에 도착하기까지의 접근 구간을 뜻합니다.
05:52~05:54 — 하늘이 먼저 붉어졌다
11분 뒤, 사진이 갑자기 여러 장 몰려 있습니다. 05:52부터 05:54까지 3분 동안 일곱 장을 찍었습니다. 하늘이 붉어지기 시작한 시각입니다.
직접 촬영(2022.9.10 05:52, 고도 1,209m) — 운해 아래로 속초 시내와 동해가 드러났다
동쪽 아래가 통째로 구름 바다였습니다. 그 구름장 틈으로 속초 시내 건물과 바다의 선이 보이고, 그 위 하늘은 주황에서 붉은색으로 층이 갈라져 있었습니다. 해는 아직 수평선 위로 올라오지 않은 상태입니다. 이 시각의 설악산 일출은 여명이 훨씬 더 화려했고, 정작 해가 뜬 뒤의 사진은 오히려 심심합니다.
직접 촬영(2022.9.10 05:54, 마등령삼거리 부근 · GPS 고도 1,202m) — 계곡 아래는 아직 어둡고 하늘만 밝다
이 세 장에서 확인되는 것이 있습니다. 계곡 안쪽은 아직 완전히 어둡습니다. 능선에 올라선 사람만 밝은 하늘을 보고, 계곡 안에 있는 사람은 한동안 더 어둠 속을 걷습니다. 새벽에 마등령을 올려치는 이유가 이것입니다. 힘든 오르막을 굳이 밤에 처리하고 나면, 능선에 올라선 시점이 정확히 이 시간대와 겹칩니다.
기온은 짐작만 할 수 있습니다. 9월 중순, 고도 1,200m, 해 뜨기 직전입니다. 땀에 젖은 채로 바람 맞는 자리라 이 시각 이 지점에서는 겉옷이 필요했습니다.
06:53 — 운해 위로 해가 올라온 뒤
다음 사진은 한 시간 뒤인 06시 53분입니다. 고도 1,216m, 좌표는 38.1580/128.4380으로 남서쪽으로 조금 이동했습니다. 마등령삼거리를 떠나 나한봉 쪽으로 붙기 시작한 지점입니다.
직접 촬영(2022.9.10 06:53, 고도 1,216m) — 구름 띠 위로 해가 올라왔고 능선은 아직 역광 속이다
한 시간 동안 사진이 없다는 사실이 이 구간을 설명합니다. 마등령삼거리에서 식사와 휴식을 했고, 그 뒤로 다시 능선에 붙었습니다. 앞에 보이는 암릉이 역광으로 새카맣게 눌려 있는데, 이 방향이 앞으로 가야 할 길입니다. 해를 정면으로 마주 보고 걷는 구간이 이어진다는 뜻이고, 실제로 오전 내내 눈이 부셨습니다.
07:21 — 나한봉, 처음으로 갈 길이 다 보인다
07시 21분 사진의 고도는 1,282m입니다. 이 산행에서 사진에 남은 가장 높은 고도값이고, 좌표는 38.1548/128.4389입니다. 나한봉 일대로 판단했습니다.
직접 촬영(2022.9.10 07:21, 나한봉 부근 · GPS 고도 1,282m) — 뾰족한 암봉들이 줄줄이 서 있고 그 뒤로 둥근 주능선이 이어진다
이 사진이 공룡능선의 성격을 가장 잘 보여줍니다. 앞쪽에 회백색 암봉이 서너 개 줄지어 솟아 있고, 그 뒤로 완만하게 둥근 큰 산줄기가 이어집니다. 문제는 저 뾰족한 암봉들을 하나씩 다 넘어야 한다는 데 있습니다. 우회로가 없습니다.
공룡능선이 힘든 이유는 총 거리나 총 고도가 아니라, 이 오르내림의 반복입니다. 4.1km를 가는 동안 봉우리를 넘고 안부로 떨어지는 일이 계속됩니다. 사진의 고도값을 늘어놓으면 그 패턴이 그대로 나옵니다. 07:21에 1,282m였다가 08:45에 1,110m로 떨어지고, 11:34에 다시 1,213m로 올라옵니다. 순수하게 얻은 고도는 얼마 되지 않는데 다리는 계속 쓰게 됩니다.
08:45 — 킹콩바위 앞, 사람 크기로 재는 스케일
08시 44분과 45분 사진은 고도 1,105m, 1,116m, 좌표 38.1494/128.4473입니다. 킹콩바위입니다.
직접 촬영(2022.9.10 08:45, 킹콩바위 · GPS 고도 1,116m) — 바위 아래쪽에 사람이 붙어 있어 크기가 짐작된다
이 사진을 고른 이유는 바위 아래쪽에 사람이 들어와 있다는 점입니다. 스케일을 짐작할 기준이 생깁니다. 좌측 아래에 배낭을 내려놓고 앉아 있는 사람들도 보입니다. 여기가 능선에서 쉴 만한 자리 중 하나였다는 뜻입니다.
시간을 보면 07:21에서 08:45까지 84분이 걸렸습니다. 직선거리로는 1km도 되지 않는 구간입니다. 이 수치가 공룡능선의 실제 속도입니다.
하늘이 완전히 바뀐 것도 이 사진에서 확인됩니다. 새벽의 붉은 하늘은 사라지고 파란 하늘에 흰 구름이 흐르는 전형적인 초가을 날씨입니다. 암벽 색도 새벽의 회색에서 살구색에 가까운 톤으로 올라와 있습니다.
10:04 — 안부에서 뒤돌아본 외설악
10시 04분과 05분 사진은 고도 1,109~1,117m, 좌표 38.1465/128.4528입니다. 킹콩바위에서 79분 걸렸습니다.
직접 촬영(2022.9.10 10:05, 공룡능선 안부 · GPS 고도 1,114m, 파노라마) — 양쪽 암릉 사이로 계곡이 열리고 그 끝에 구름 띠가 걸려 있다
파노라마로 찍은 이 한 장이 능선의 지형을 가장 잘 보여줍니다. 좌우로 암벽이 벽처럼 서고, 그 사이 좁은 계곡이 아래로 길게 떨어집니다. 계곡 끝에는 구름 띠가 낮게 깔려 있습니다. 능선이 계곡 두 개를 나누는 담장 역할을 하고 있고, 그 담장의 등을 밟고 가는 것이 이 코스입니다.
직접 촬영(2022.9.10 10:04, 공룡능선 안부 · GPS 고도 1,109m) — 구름 아래로 울산바위와 속초 시내가 보인다
같은 자리에서 북쪽을 당겨 찍은 사진에는 울산바위가 들어와 있습니다. 그 뒤로 속초 시내와 논밭이 이어지고, 구름장이 그 위를 가로로 덮고 있습니다. 산 안쪽에서 반나절을 보낸 뒤에 갑자기 사람 사는 평지가 보이면 거리감이 이상해집니다. 저기까지 걸어 내려가야 한다는 사실이 실감나는 자리이기도 합니다.
11:34 — 신선대 이정표, 희운각 1.0km
11시 34분, 앞서 말한 이정표 앞에 도착합니다. 고도 1,213m, 좌표 38.1387/128.4620입니다.
직접 촬영(2022.9.10 11:34, 신선대 · 표지판 표기 해발 1,214m) — 위치표지 “설악 03-08”과 함께 네 방향 거리가 적혀 있다
이 이정표를 보는 순간의 감정은 단순합니다. 희운각대피소 1.0km. 능선이 끝났다는 뜻입니다. 남은 것은 무너미고개까지 내려가는 급한 하산길이고, 그다음은 천불동계곡을 따라 걷는 긴 길입니다. 힘들기는 하지만 성격이 완전히 다른 길입니다.
직접 촬영(2022.9.10 11:35, 신선대 · GPS 고도 1,219m) — 대청봉 방향 주능선을 구름이 넘어오고 있다
이정표가 대청봉 3.5km를 가리키는 방향으로 카메라를 돌리면 주능선이 보입니다. 사진에서는 구름이 능선 뒤에서 앞으로 넘어오고 있습니다. 능선을 타고 흘러내리는 구름이 사면 위에 얇게 깔려 있는데, 오전 늦게 서쪽 습기가 주능선을 넘어오는 흔한 모양입니다. 새벽에 그렇게 맑았던 하늘이 이 시각에는 흐린 회색으로 바뀌어 있습니다.
직접 촬영(2022.9.10 11:35, 신선대에서 당겨 촬영) — 골짜기 안쪽 숲 사이에 대피소 건물 지붕이 보인다
같은 자리에서 아래쪽을 당겨 찍으면 골짜기 숲 사이에 희운각대피소의 회색 지붕이 보입니다. 1.0km라는 표기가 눈으로 확인되는 순간입니다. 사진에서 보이는 대로 대피소는 능선보다 한참 아래에 있어서, 이 1km는 거리보다 낙차가 문제인 구간입니다.
사진이 남긴 그날의 시간표
| 시각(KST) | 사진 고도 | 좌표 | 지점 판단 |
|---|---|---|---|
| 05:41 | 1,125m | 38.1609/128.4413 | 마등령삼거리 |
| 05:52~05:54 | 1,132~1,212m | 38.1608/128.4393~0.4398 | 마등령삼거리 조망 지점, 일출 전 |
| 06:53 | 1,216m | 38.1580/128.4380 | 나한봉 방향 진입 |
| 07:21 | 1,282m | 38.1548/128.4389 | 나한봉 일대 |
| 08:45 | 1,116m | 38.1494/128.4473 | 킹콩바위 |
| 10:04~10:05 | 1,109~1,117m | 38.1465/128.4528 | 1275봉 앞 안부 |
| 11:34~11:35 | 1,213~1,219m | 38.1387/128.4620 | 신선대(표지판 1,214m) |
정리하면 마등령삼거리에서 신선대까지 4.1km에 5시간 54분입니다. 여기에 소공원에서 마등령까지의 야간 오르막과, 신선대에서 희운각·무너미고개를 거쳐 천불동계곡으로 비선대까지 내려오는 7.6km가 앞뒤로 붙습니다. 능선 4.1km는 전체 산행의 3분의 1도 되지 않는데, 시간과 체력은 절반 이상 여기서 쓰입니다.
이 코스를 갈 사람에게 남기는 정보
야간에 오를 구간을 정해두는 편이 낫습니다. 저는 소공원에서 마등령까지를 밤에 처리했습니다. 결과적으로 마등령삼거리 도착이 05:41이 되어 능선에서 일출을 받았고, 능선의 암릉 구간은 전부 밝을 때 지났습니다. 반대로 능선을 어두울 때 걷는 배분은 위험합니다. 손을 써서 오르는 구간이 계속 나오는 길이라 시야가 있어야 합니다.
물은 능선에서 구할 수 없습니다. 이 산행에서 물을 넉넉히 지고 올라간 것은 식수원을 찾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능선 4.1km 구간에는 물을 채울 곳이 없고, 그다음 확실한 지점이 희운각대피소입니다. 즉 마등령삼거리에서 희운각까지, 제 기록으로는 여섯 시간 넘는 구간을 지고 있는 물로만 버텨야 합니다. 9월이라도 능선은 그늘이 거의 없어 소모가 큽니다.
장갑은 장비가 아니라 필수품입니다. 네발로 붙어 올라가는 구간이 반복됩니다. 킹콩바위 사진에서 보이듯 사람이 바위에 몸을 붙여 지나가는 자리가 여러 곳입니다. 손바닥이 까지면 그다음 모든 구간에서 힘을 못 씁니다.
탈출로가 없다는 점이 이 코스의 실질적인 난이도입니다. 마등령삼거리에서 능선에 붙으면 신선대 전까지 중간에 내려갈 길이 없습니다. 제 기록으로 그 사이가 6시간입니다. 능선에 붙기 전, 마등령삼거리에서 컨디션을 판정하는 것이 사실상 마지막 결정 지점입니다. 여기서 이미 힘들다면 비선대로 되돌아 내려가는 선택이 낫습니다.
통제 시각을 미리 확인해야 합니다. 설악산은 구간별 입산 통제 시각이 계절에 따라 바뀌고, 공룡능선처럼 긴 코스는 대피소 예약 여부와 통제 시각에 계획이 좌우됩니다. 이 수치는 해마다 조정되니 국립공원공단 공지에서 산행 직전 값을 확인하는 편이 안전합니다. 제 경우는 9월 초순 기준으로 계획을 짰습니다.
하산이 남아 있다는 것을 계산에 넣어야 합니다. 신선대 이정표의 비선대 7.6km가 그것입니다. 능선을 끝냈다는 안도감으로 페이스가 무너지기 쉬운데, 무너미고개에서 천불동계곡으로 내려가는 길은 돌계단과 철계단이 이어집니다. 하루 종일 쓴 무릎으로 내려가야 하는 구간이라 실제 소요는 예상보다 깁니다.
다녀오고 남은 것
공룡능선을 끝내고 나서 든 생각은 풍경 이야기가 아니었습니다. 지금까지 산에 오르던 방식으로는 이 길을 다시 오기 어렵겠다는 것이었습니다. 힘으로 버티는 방식이 아니라 속도를 일정하게 유지하고 휴식을 관리하는 방식이 필요했습니다.
사진 스물세 장의 시각을 늘어놓고 보니 그 판단의 근거가 숫자로 남아 있었습니다. 05:41에서 11:34까지, 4.1km. 이 코스를 다녀온 뒤에 남는 것은 절경 몇 장이 아니라 이 두 줄인 것 같습니다.
문의·연락: bumseok.view [at] gmail [dot] 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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